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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중론의 이해 3

by 미소천사1004 2022. 11. 30.

  우리는 보이는 것은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나가르주나(용수 보살)는 이것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의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는가?  자신의 눈도 볼 수 없으면서 다른 것이 존재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보는 것이 보여진 것, 보고 싶은 것은 아닌지 묻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봄인가?' 하고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다른 제 학파들의 주장을 검토합니다.  인도의 논리학에 따라 자기원인, 외부원인, 자기-외부원인, 무원인의 네 가지 측면에서 각 주장들을 검증합니다.

그래서 첫째 경험적인 증거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 것은 거부합니다.

둘째 영원한 실재로 간주되는 자성과 동등하다는 점에서 동일성을 부정합니다.

셋째 차이성도 단멸이나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하는 타성으로 인식되기에 거부합니다.

 

  나가르주나는 대상에서 공간으로 관심을 넓힙니다.  상좌부에서는 공간은 조건 지워진 것이 아닌, 色을 일정한 장소에 놓이게 할 수 있는 ‘무장애’라는 독특한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공간을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순수한 실체, 곧 여러 가지 속성들이 귀속하는 실체로 이해한다면 공간이 속성들에 선행하게 됩니다.  상을 띤 것과 그 속성은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속성이 없는 상을 띤 것 역시 별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연기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4-19) 하였습니다.

 

  영원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연기하기 때문에 공성인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공성은 견해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막연한 견해가 아니라, 공한 것에서 식별되는 그런 견해입니다.  그것을 공한 이것이거나 궁극적인 진리라고 하는 것은 붓다도 나가르주나도 결코 주장한 적이 없었습니다.

  붓다는 진리의 반대개념으로 혼미를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도 별도의 주체가 있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작용이라고 봅니다.  과거의 무명(無名)이 행(行)을 쌓아 이것이 현재의 명색(名色)을 낳고 현재의 집착(愛 取)이 미래의 생(生)을 낳는다고 봅니다.

 

  行은 사물을 결합하는 개념작용으로 이 과정에서 우리의 관심이 주된 역할을 합니다.  관심은 쉽게 좋음과 싫음으로 바뀌는데, 이 좋음과 싫음이 대부분 인간 고의 원인이 됩니다.  살기 위해선 행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고를 안겨줍니다.

  현재의 세계는 우리의 감각기관(六處)에 엄청나고 지독하게 시끌벅적거리는(觸) 혼란스러움(受) 속에서 개인의 선호(愛)에 의해 선택된(取) 구성되고(有) 만들어지고 조합된 것(生)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쇠퇴와 소멸의 과정(老死)을 갖게 됩니다.

 

  의존적발생(연기)의 개념은 실체 곧 자성을 수반하는 자기원인의 관념에서 벗어나 그래서 ‘그 자성이 적정하다’라는 생각도 없으며, 자기나 타자의 개념도 낳지 않으므로, 그 결과 탐욕이나 미움, 애착, 증오를 낳지도 않는 것입니다.

  단멸론이 도덕적책임을 부인하는 것에 반해 붓다는 ‘행위는 자기 자신이 일으키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도덕적으로 청정한 생활을 원하면 자신의 청정함과 부정함에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백하고 확연하게 주장합니다.  열반은 궁극의 과보이고 일상생활의 과보의 정점이며, 비도덕적 행위는 피하고 선은 증진시키는 최고의 도덕적 완성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달리는 차안에서 가만히 차창을 바라보면 나는 움직이지 않지만 경치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듯이 중론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상대적인 세계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현재의 온갖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절대적 세계관에 있으며, 이러한 절대적 세계관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과응보의 중요성을 인정하기에 윤회를 인정하지만 그것은 절대적 자아의 인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결단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상대적 세계관과 도덕적 가치관에 근거한 삶의 선택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행동의 선택을 강조하며 선하게 사는 삶의 결과로 얻게 되는 해탈과 열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용수는 중론을 끝내며 이러한 진정한 가르침이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자비심에 의한 것임을 언급하며 석가모니부처님에게 경배를 드리며 중론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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