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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신하가 꿈꾼 이상향의 궁궐 (경복궁)

by 미소천사1004 2022. 11. 21.

  궁궐이란 왕이 사는 궁과 궁을 지키는 성곽-궐을 말합니다. 한양에 위치한 궁궐에는 수도의 규모가 커져 궐의 의미는 흔적만 남고 궁의 의미가 중요해집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남문 광화문과 흥례문입니다.

 

  궁의 건립은 유교의 이념에 따라 3조 3문의 주나라의 예를 따라 지어집니다. 3조란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연조와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나누는 편전과 행사를 치르는 정전 등으로 구성된 치조, 궐내각사와 같이 신하들이 근무하는 외조를 말하며 이러한 3개의 구역을 성곽과 문으로 구분한 것이 3조 3문의 기준입니다.  근정문과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입니다.

 

  경복궁은 이러한 3조3문의 예를 따라 북악산 밑 평지에 정남향으로 3개의 구역으로 나뉜 네모난 형태로 지어진 궁궐입니다. 경복궁의 건립은 조선의 건립에 기초적인 이념을 제시한 정도전이 맡게 됩니다. 정도전은 궁궐은 화려하되 소박하게 건립되어야 한다고 하여 개경에 있는 궁궐에 비해 검소하게 평지에 네모난 형태의 궁궐을 짓게 됩니다. 왕과 왕비의 전각도 최소한으로 지어집니다.

 

  이러한 경복궁은 왕에게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경복궁을 건립한 태조는 지어진지 얼마 안 되어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2대 임금인 정종은 아예 개경으로 환도를 합니다. 3대 임금인 태종은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지만 궁궐은 경복궁 동쪽에 창덕궁을 지어 옮겨갑니다. 당시 건축형태인 목조건물은 화재 등 파손에 취약하여 법궁인 정궁과 이궁을 두는 것에 신하들도 동의하게 됩니다.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나누던 편전인 사정전입니다.  아래는 왕의 침전인 강령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입니다.

 

  창덕궁으로 옮겨간 태종은 경복궁에도 신경을 쓰는데 행사 등을 위하여 경회루를 중건합니다. 이후 4대 임금인 세종 때에 많은 전각을 짓고 경복궁으로 옮겨갑니다.  경회루는 창덕궁의 주합루와 비교되는데  주합루는 부용지에 지어진 2층 전각입니다.  주합루는 약간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출입문인 어수문을 설치합니다.  주위는 나무울타리가 있어 주위의 경관을 거스르지 않으며 출입자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집니다.  그러나 경회루는 사방이 트인 공간에 지어져 행사의 전말을 사방에 보여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에 궁이 불에 타 폐허가 된 후에 고종이 중건을 할 때까지 경복궁은 버려진 궁터가 됩니다. 왕권의 중흥을 위해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지만 일본군의 무자비한 침입에 왕비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후 고종은 덕수궁(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도 창덕궁으로 거처를 정합니다.  아래는 함원전입니다.

 

  정도전이 유교의 이념에 따라 지은 경복궁은 조선 왕조 내내 임금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왜국 군인들에게 침탈을 받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일제 식민지시대에는 경복궁 앞에 총독부를 짓고 경복궁의 전각을 파괴합니다.  심지어 일부 전각은 해체하여 판매하기까지 합니다.  1997년 일제 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1888년 고종 당시 중건 된 모습을 기준으로 복원사업을 합니다.  지금은 2011년부터 2045년까지 제2차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네요.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사회에서는 왕은 성군이며, 잘못을 저지르는 임금은 일개 평민에 불과해 쫓겨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궁궐도 왕의 사생활보다는 정사를 중심으로 한 공적공간으로 지어집니다.  아래는 복원된 동궁입니다.

 

  왕은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사관은 지근거리에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였고 왕의 프라이버시는  존중되지 않았습니다.  공적공간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프라이버시마저 보장되지 않는 생활이 어떠했을까요?  세종과 같은 성군에게는 의미 있는 생활이었을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임금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공간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공간이 고통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가 성군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임금들은 말을 못 하는 자연, 즉 풍수를 거론하며 이 공간을 꺼렸던 것은 아닐까요?  아래는 근정전의 천장에 있는 용 문양과 회랑의 모습입니다.

 

  아래는 경회루를 팔때 나온 흙을 모아 동산을 만든 교태전 후원인 아미산과 담장입니다.  경복궁은 평지에 지어져 동산도 흙을 모아 만들었네요.

 

  경복궁은 궐의 의미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동십자각입니다.  궁을 지키는 망루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현대의 임금에 해당하는 대통령이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해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곳에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중됩니다.  그러나 먹은 음식, 옷을 가지고도 대서특필하는 곳에서 과연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될 수 있을까요?  결국 개인의 차이와 다름이 인정되지 않고, 프라이버시가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어디에 있더라도 구중궁궐을 쌓고 스스로를 격리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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